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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3) 남편, 죽는 날까지 목회·기도… 홀사모가 되다
작성자 : 작성일시 : 2015-06-05

목사 안수를 받고 있는 이에스더 목사.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야간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한 뒤 목회 일선에 나서게 된다.

 

고교시절 난 전국 행사인 남원 춘향이로 뽑히기도 했고 미스코리아에 출전했다가 지역 결선에서 어머니에 의해 단상에서 끌려 내려오기도 했다. 한때 영화 촬영까지 하다 부모님의 반대로 중단할 만큼 외모에는 자신이 있었고 여기에 발레까지 전공해 몸매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눈이 높을 만큼 높았고 자존심도 무척 셌다. 그리고 절대 목회자와 결혼 안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목회자 사모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센 기도를 당해낼 수 없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갇혀 지내려니 매우 갑갑했다.

남편은 사회도 잘 보고 영어와 음악 실력도 뛰어난 다재다능한 목회자였다. 목회엔 정말 열심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우니 난 가계를 돕느라 다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발레 레슨을 했다. 남편이 속한 장로교(기장)는 교단에서 정해주는 목회지로 가야 했다. 문산에서 다시 김제로 갔다가 안양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을 때였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지나치게 무리하며 목회하던 남편이 갑자기 소회가 안 되고 혈압이 높아지는 이상증세로 힘들어했다. 목회는 점점 자리를 잡고 성도는 느는데 남편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난 일단 학교 근무를 중단하고 간병에 매달렸다. 그런데 남편은 병약한 몸을 외면한 채 40일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이를 시작했다.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나는 남편을 살려 달라고 주님께 뜨겁게 부르짖었지만 결국 남편은 소천하셨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은 엄청났다. 이어진 현실도 암담했다. 당시 난 네 자녀를 두었다. 맏이가 중학교 3학년 그리고 둘째가 중학교 1학년, 둘 다 딸이었다. 그 밑에 2년 터울로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 아들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목회자 남편이 소천하면 사모와 아이들은 대책 없이 사택을 비워주고 나가야 했다. 전셋집이라도 하나 얻어주는 배려나 일정 기간의 생활비 지원도 전혀 없었다. 이때 난 홀사모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 내가 목사가 되고 안정을 찾으면서 홀사모 돕기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직접 체험해 보아야 그 아픔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책임져 달라고 눈물을 뿌리며 기도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할수록 남편이 못다한 목회를 내가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솟았다. 이것은 개인 의지가 아닌 성령의 명령이었다.

나는 당시 서울 청파동에 있던 대한신학교를 찾아 야간에 신학 공부를 하고 낮에는 교회 사역을 하며 아이들을 양육했다. 여성 목회자를 처음 배출한 중앙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막상 목회 일선에 나서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편 친구와 아는 분들이 거의 목사인데 아내인 내가 목회를 한다고 하면 다 비웃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기간에 나는 골방기도를 통해 영성을 쌓고 또 쌓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가혹한 현실을 주시는지 따지고 싶기도 했지만 이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예전과 다른, 깊은 믿음을 키우게 해 주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하여 목회에 집중하던 나에게 캐나다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사님, 안수도 받으셨으니 말씀에 목말라하는 캐나다 한인들을 위해 순회설교 좀 해 주세요. 비자 기간인 3개월간 지내시며 좀 쉬기도 하시구요.”

이 제안은 갑갑해하던 내게 새로운 돌파구였다. 그러나 한창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문제였다. 시댁에 노크를 했더니 모두 고개를 저었고 결국 친정에 애들을 맡기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아이들 걱정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