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소금으로

3일 기도의 영적파워

  • HOME
  • 빛으로 소금으로
  • 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2) 나를 10번 찍어 반려자로 삼은 장경환 전도사
작성자 : 작성일시 : 2015-06-04

목사가 되어 왕성하게 사역하던 어느 날, 영적 멘토인 고 임영재 목사님 부부를 모시고 식사 접대를 했다. 왼쪽이 이에스더 목사.

 

중학교 때 금요철야예배 시간에 성령을 체험하고 깊은 회개기도 가운데 방언까지 하게 된 나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성령의 불을 받으니 내가 죄인인 것이 인정되고 회개가 터져 밤새도록 기도해도 시간가는 줄 몰랐다. 거듭남의 체험은 기쁨과 감사, 은혜를 충만하게 했다. 깊은 기도는 은사로 이어졌고 어린 나이임에도 영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목회자는 가난한 것이 당연했던 때였다. 후줄근한 옷에 비쩍 마른 몸에 성경책만 옆에 끼고 다니는 모습은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사모만큼은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반면 코쟁이로 불리는 외국 선교사들이 멋진 옷에 지프를 타고 우리가 보지도 못한 서양음식을 먹는 것이 부러웠다. 차라리 미국사람에게 시집 가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머님의 오랜 지병으로 인해 집안 살림을 도맡았고 이를 야무지게 잘해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오랜 투병 중에도 기도생활은 철저하게 하셨는데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신유를 체험하시고 병을 이겨내셨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걸스카우트 대원으로 봉사했고, 대학에서 발레를 전공해 고등학교 발레 교사가 되었다. 난 집안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목회자 사모가 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느 날 한 기도원 집회에 참석한 어머니는 한신대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봉직하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나 사윗감으로 점찍으셨다. 열정적이고 용모도 뛰어난 이 장경환 전도사에게 나를 시집보내고픈 마음이 드셨던 것이다.

“내가 봐둔 전도사와 선을 보기로 했으니 그리 알아라.”

“엄마. 난 절대로 목사에겐 시집 안 가요. 딸을 평생 고생시키려고 하세요? 생활능력도 없는 가난한 전도사 전 싫어요.”

어머니는 양가 어머니들이 선을 보기로 약속은 했지만 내가 워낙 단호하게 거절하자 아주 난처한 상황이 됐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교회의 믿음 좋은 처녀를 딸이라고 하고 맞선 자리에 나가게 했는데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 전도사는 포기하지 않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불쑥 찾아왔다. 매스게임을 지도하던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아주 쌀쌀맞게 대하고 돌려보냈는데 그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집요하게 구애를 해왔다. 나는 정식으로 맞선을 보겠다고 한 뒤 일부러 짧은 치마를 입고 한껏 멋을 내고 나갔다. 내가 사모감으로 적절치 않다고 그쪽 어머니에게 보이고 포기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어머니는 예상대로 아니라고 손을 저었지만 장 전도사는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맞는 말이었다. 나를 위한 열정적인 구혼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고 나는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 YMCA회관에서 예배 형식으로 드린 결혼식에서 나는 과감한 초미니드레스를 입어 하객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나는 그토록 목회자와는 결혼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나의 길을 예비해 서서히 당신의 종으로 쓰기 위한 준비를 하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난 결국 우리 집안의 가풍대로 목회자 아내가 되었고 남편은 경기도 파주 탄현면의 25평 정도 작은 교회에 첫 부임을 했다. 초가집 사택이 딸린 이 교회는 임진강이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 달 목회자 사례비가 쌀 두 말에 보리 한 말, 현찰 2만원이 전부였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